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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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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알바니아는 크기는 작지만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여러 민족과 나라들이 거쳐 간 알바니아는 세계 강국들에 의해 짓밟혔으며, 수십 년간 철저히 고립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겪었지만,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기쁨을 주는 영적 번영을 누리게 하심으로 그들을 축복하고 지원해 오셨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그들의 흥미진진한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하며 “여호와의 손”이 어떻게 이 나라에 있는 그분의 겸손한 종들을 도왔는지 알려 줍니다.—사도 11:21.

여러 세기 동안 외국의 열강들은 알바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종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1500년대 초에 이 지역은 사람들이 제각기 이슬람교도, 정교회 신자 또는 가톨릭교도라고 공언할 정도로 종교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1800년대 말에 알바니아에서는 민족주의가 고조되었으며 여러 개의 민족 운동 단체가 생겨났습니다. 대부분의 알바니아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자신이 겪는 가난의 원인이 여러 해 동안 이어져 온 외세의 간섭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00년경에 알바니아는 자주독립을 이루려는 열망으로 가득 찼는데, 그러한 열망은 그리스, 세르비아 및 터키와의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1912년에 알바니아는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그 후에 정부 정책으로 인해 종교 조직의 활동이 사실상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정권은 모든 종교를 없애 버렸으며, 세계 최초의 무신론 국가임을 자처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기뻐하다’

기원 56년이 되기 전에 사도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로마 속주인 “일리리쿰까지” 좋은 소식을 철저히 전파했다고 기록했는데, 그곳에는 오늘날의 알바니아 지역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15:19) 당시 그 지역의 일부 주민들이 참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세속 역사에 의하면 그리스도교가 1세기에 알바니아에 자리를 잡았다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근대에 들어 이 일대에서 행해진 참숭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 이오안네스 보스도이안니스는 크레타에서 브루클린 베델로 편지하여, 현재는 그리스 남부에 속한 이오안니나에 있는 성경 “연구반”을 방문한 일에 관해 알렸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많은 알바니아 사람들이 미국 뉴잉글랜드에 정착하였는데, 그중에는 타나스 (나쇼) 이드리지와 코스타 미첼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배워 알게 되자 즉시 침례를 받았습니다. 1922년에 이드리지 형제는 알바니아 사람으로는 최초로 성서 진리를 가지고 고국인 알바니아의 기로카스터르로 돌아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가 보인 자기희생적인 정신을 축복하셨으며,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 거주하던, 믿음을 가진 다른 알바니아 사람들도 이내 그를 따라 고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한편 코스타 미첼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 있는 알바니아 밭에서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소크랏 둘리와 타나스 둘리(아탄 둘리스)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터키로 이민을 갔습니다. 하지만 소크랏은 1922년에 알바니아로 돌아왔고 이듬해에는 14세였던 타나스도 형을 찾아 귀국하였습니다. 타나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예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형을 곧바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형이 2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파수대」와 성서 그리고 일곱 권으로 된 「성경 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와 성서에 관한 다른 책자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외딴 산악 지대에도, 미국에 갔다가 성서 지식과 성서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돌아온 활동적인 성경 연구생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두 형제가 만나게 되자, 그 무렵에는 침례 받은 성경 연구생이 되어 있던 소크랏은 주저하지 않고 동생인 타나스에게 진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1924년에 루마니아 사무실은 새로 열린 알바니아의 밭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증거 활동은 아직 제한적이었지만, 「파수대」(영문) 1925년 12월 1일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문고」 그리고 「바람직한 정부」(The Desirable Government)와 「세계 고난」(The World Distress) 소책자가 현지 언어로 번역되어 인쇄되었다. ··· 상당수의 출판물이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며, 알바니아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고 크게 기뻐하고 있다.”

당시에 알바니아는 정치적 분쟁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종들은 어떠하였습니까? 타나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1925년에 알바니아에는 세 개의 회중이 조직되어 있었고, 격지에 있는 성경 연구생들도 있었습니다.” 타나스는 여호와의 종들 사이에 존재한 사랑이 주변 사람들이 나타내는 분쟁, 이기심, 경쟁심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었다고도 기술하였습니다. 많은 알바니아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고 있었지만 진리를 알게 된 사람들은 새로 설립된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해 친족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귀국하였습니다.

한편, 보스턴에서는 일요일 아침마다 약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알바니아어로 공개 강연이 제공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성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여러 권으로 된 「성경 연구」를 읽고 검토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문고」 책도 철저히 연구하였습니다. 오역이 몇 군데 있기는 했지만, (일례로, 처음에 번역된 제목은 「하나님의 기타」였다) 이 책은 많은 알바니아 사람들이 성서 진리를 배우고 강한 믿음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시오!’

1926년에 「파수대」는 알바니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13명이 참석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1927 연감」은 “알바니아에는 성별된 형제들이 15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왕국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알려 주면서, “미국에는 성별된 알바니아 형제들이 약 30명 정도 있으며, 이들은 동포들에게 진리를 알려 주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알바니아에 있는 15명의 형제들은 1927년 기념식에 27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기뻐했는데, 참석자 수는 전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1920년대 말에 알바니아의 정국은 여전히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정교회 주교인 판 놀리가 이끄는 정부가 잠시 집권하였지만, 악메드 베이 조그 대통령에 의해 전복되었습니다. 조그 대통령은 알바니아가 왕국임을 선포하였으며, 국왕 조그 1세가 되어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1928년에 라자르 나손, 페트로 스타브로 그리고 다른 형제 두 명이 미국에서 알바니아로 와서 “창조 사진극”을 상영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온 가톨릭 사제와 정교회 사제도 알바니아에 체류하면서 국왕 조그 1세를 만났습니다.

가톨릭 사제는 왕에게 이렇게 조언하였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폐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미국에서 온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교회 사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사제는 그 형제들이 보스턴에 있는 자신의 교회에서 탈퇴한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그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알바니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들과 같다면, 폐하께서는 궁전 문을 잠그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 일에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시오!”

그해에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Songs of Praise to Jehovah) 책이 보스턴에서 알바니아어로 인쇄됨에 따라, 얼마 후에 알바니아에 있는 형제들도 그 책에 실린 노래의 선율과 가사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특히 좋아했던 두 곡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와 “활동하세!”였는데, 이 노래들은 이후에 닥친 어려운 시기에 형제들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알바니아 사람들은 말을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싸우는 것 같은 대화도 알바니아 사람들은 대개 일상적이고 허심탄회한 대화로 여깁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대한 확신이 서면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흔히 소신 있게 말과 행동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질은 그들이 좋은 소식에 나타내는 반응에 분명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려움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다

정치·경제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알바니아를 떠났는데, 그들 중 일부는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에서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알바니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진리가 번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출판물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던 알바니아 형제들은 모국어로 된 「왕국」(Kingdom)과 「위기」(The Crisis) 소책자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한편, 알바니아 당국은 우리의 출판물 중 일부를 압수하였습니다. 하지만 1934년에, 「우리의 왕국 봉사」의 전신인 「회보」(Bulletin)에는 알바니아에서 온 다음과 같은 보고가 실렸습니다. “앞으로는 우리의 모든 출판물을 자유롭게 배부할 수 있게 하라는 취지의 법무부 장관 명령이 얼마 전에 모든 지방에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 형제들은 여러 경찰청장이 압수한 서적과 소책자를 모두 돌려받았습니다. ··· 현재 일곱 명의 형제가 차를 빌려 서적을 싣고 멀리 떨어진 도시들을 방문하고 있으며, 나머지 형제들은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형제들은 1935년과 1936년에 6500여 부의 출판물을 전하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들을 있는 방송”

1936년 초에 영국 신문인 「리즈 머큐리」에 이러한 보도가 실렸습니다.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들을 수 있는 방송이 시도될 예정이다. 이 행사에서는 복음 전도자 러더퍼드 판사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연설을 한다.” 당시에 여호와의 증인을 이끌던 J. F. 러더퍼드가 강연을 할 예정이었는데, 그 강연은 무선 전화를 통해 미국과 영국 전역에 송출되고 여러 유럽 국가로도 중계될 것이었습니다. 동 신문에서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연설을 들을 수 없는 유럽 국가가 분명 하나 있다. 그 나라는 전화 시설이 없는 알바니아이다.”

하지만 강연이 끝나고 몇 주 후에, 보스턴의 알바니아 회중에 속한 니콜라스 크리스토는 세계 본부에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최근에 알바니아에서 온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곳에서도 ‘모든 나라 사람들을 분리하는 일’에 관한 러더퍼드 판사의 연설을 들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강연을 들은 여러 나라 가운데 알바니아도 포함되었습니다. 두 곳에서 전파가 잡혔는데 ··· 아마도 단파 방송을 수신한 것 같습니다. ··· 형제들은 러더퍼드 판사의 음성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알바니아 전도인들은 「파수대」가 모국어로 발행되기 전에 어떻게 집회를 보았습니까? 진리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알바니아 사람들은 알바니아 남부에서 그리스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 「파수대」로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판으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알바니아어로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형제들은 출판물을 머릿속으로 번역해 가며 집회를 보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스턴에서도 월요일 저녁에 그리스어 잡지로 알바니아어 「파수대」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많은 형제들이 자녀들을 훌륭하게 가르친 결과, 세월이 지나 그들의 자녀, 조카, 손자, 증손자 세대까지 전 시간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알바니아 형제들의 열심 있는 증거 활동이 얼마나 잘 알려졌던지, 사람들은 그들을 “복음 전파자”를 뜻하는 운질로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위층에게 증거하다

조그 왕의 군주 정치 체제가 전복되기 1년 전인 1938년에, 왕의 여동생 두 명이 보스턴에 왔습니다. 그해 12월 「위안」지(현재의 「깨어라!」)에는 다음과 같은 보고가 실렸습니다. “알바니아 공주들이 보스턴에 왔을 때, 여호와의 증인 보스턴 부회의 알바니아 집단에 속한 저희 두 사람이 공주 일행이 묵고 있는 호텔을 방문하여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매우 친절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공주들을 방문한 두 증인은 니콜라스 크리스토와 그의 누이인 리나였습니다. 그들은 공주들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주재 알바니아 대사인 파익 코니차를 비롯한 5명의 고관을 만났습니다. 두 증인은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알바니아어 증거 카드를 읽어 주었는데, 그 카드에는 진리가 알바니아 사람들에게 얼마나 널리 전파되고 있는지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증거 카드의 일부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알바니아에서도 오랫동안 선포되어 왔으며, 계몽과 위로를 위해 수만 부의 책이 관리들과 알바니아 국민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코니차 대사는 공주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바람은 두 분이 힘을 써서 자신들의 포교 활동이 알바니아에서 방해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분들의 종교는 일종의 ‘신흥’ 종교 인데, 얼마 안 있어 세상[현 세상 체제]이 종말을 맞은 뒤에,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들이 부활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코니차 대사는 어떻게 왕국 소식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고 있었습니까? 「위안」지에는 이러한 설명이 실렸습니다. “한 증인이 ··· 진리 안에 들어오기 오래전부터 대사와 잘 아는 사이여서 ··· 진리에 대해 몇 차례 대화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가져온 시련

1930년대에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장악하였으며, 조그 왕 일가는 1939년에 국외로 도피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침공해 온 파시스트 군대는 우리의 출판물을 금지시키고, 50명의 전도인이 수행하던 전파 활동을 불법 행위로 규정하였습니다. 1940년 여름에 약 1만 5000부의 출판물을 압류당하였습니다. 8월 6일에 컬키레에서 파시스트 당국은 형제 9명을 체포하여 가로 2미터, 세로 4미터 크기의 감방에 가두었다가 티라나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재판도 받지 못한 채 8개월간 감금되어 있다가, 나중에서야 10개월 내지 2년 반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수감자들은 자기 가족으로부터 음식을 구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감된 형제들은 대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음식을 구할 것이었습니까?

나쇼 도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15일마다 마른 빵 800그램과 숯 3킬로그램과 비누 하나를 지급받았습니다. 야니 코미노와 나에게는 콩 1킬로그램을 살 만한 돈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숯을 피워 콩을 삶았는데, 다른 수감자들이 한 숟가락 단위로 삶은 콩을 사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내 커다란 그릇 다섯 개에 콩을 삶아야 할 정도가 되었죠. 결국 고기를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생겼습니다.”

1940년과 1941년 사이 겨울에 그리스 군대는 알바니아 남부를 침공하여 남자들을 강제로 그리스군에 입대시켰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한 형제가 중립 입장을 밝히며 군 복무를 거부하자, 군인들은 그의 머리끄덩이를 잡은 채 끌고 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구타하였습니다.

형제가 의식을 되찾자, 지휘관은 “그래도 말을 안 들을 건가?”라고 쏘아붙이듯 말했습니다.

형제는 “어떻게 하시든 저는 중립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군인들은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며칠 뒤에 그 지휘관은 자신이 고문한 형제의 집을 찾아가 그의 용기 있는 태도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나는 이탈리아 사람 12명을 죽여 훈장을 받았네. 하지만 나는 양심이 괴로워 차마 그 훈장을 달고 다닐 수가 없어서 항상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다네. 훈장이 범죄 행위의 증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일세.”

정권이 바뀌어도 시련은 계속되다

전투와 전쟁의 혼란 속에, 파시스트가 지배권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상황 가운데서도 알바니아 공산당은 은밀히 기반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1943년에, 공산당과 싸우고 있던 군인들이 형제 한 명을 붙잡아 트럭에 실어 전방으로 데려가더니 총을 건네주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는 집총을 거부하였습니다.

지휘관은 이렇게 고함을 쳤습니다. “넌 공산당원이 틀림없어!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제들처럼 나가서 싸웠을 거야!”

지휘관은 군인들에게 형제를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총살형을 집행하려던 찰나에 다른 장교가 와서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형제의 중립 입장을 알게 된 장교는 총살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형제를 풀어 주었습니다.

1943년 9월에 파시스트가 철수하고 독일군이 침공하면서 하룻밤 사이에 티라나에서 8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한편 형제들은 성서에 기초한 희망과 격려의 글을 작성하여 종이에 타자하였습니다. 형제들은 타자된 글을 다 읽은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도 읽어 볼 수 있도록 그 종이를 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외에도, 형제들은 숨겨 두었던 소책자 몇 권을 가지고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부분역 성서만 가지고 전파하였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 그들에게는 완역 성서가 없었습니다.

1945년까지 15명의 형제들이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중 두 형제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한 명은 그곳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알바니아에 있는 형제들은 추축국을 위해 군 복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고, 미국에 있는 일부 알바니아 형제들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습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알바니아에서, 압류된 출판물은 세관에 보관되었습니다. 세관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건물이 무너지면서 상당량의 우리 출판물이 거리에 나뒹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호기심을 느낀 행인들은 책과 소책자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서둘러, 남아 있는 출판물을 주워 모았습니다.

1944년에 독일군이 알바니아에서 철수하면서, 공산군이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그 즉시 형제들은 소책자를 다시 인쇄하기 위해 허가를 신청하였지만,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말을 들었습니다. “「파수대」에서는 교직자들을 공격하는데, 교직자들은 알바니아에서 여전히 인정받는 분들입니다.”

전쟁 후에도 계속된 박해

새로 들어선 공산 정권은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건물, 공장, 기업, 상점, 극장 등을 차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토지를 매매하거나 임대할 수 없었으며, 수확물은 모두 국가에 바쳐야 하였습니다. 1946년 1월 11일에 알바니아는 국명을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였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공산당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엔베르 호자를 국가 수반으로 하는 공산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더 많은 학교들이 문을 열었으며, 아이들은 글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선전하지 않는 출판물을 읽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의 출판물은 압수되었으며, 형제들이 가지고 있던 소량의 종이와 몇 대 안 되던 타자기도 정부에서 압류했습니다.

출판물을 발행하기 위한 허가를 받으려고 할 때마다 형제들은 번번이 거부당하였으며 위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국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알바니아 사람들에게 알릴 책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으니, 이제는 여러분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정부 측의 반응은 ‘이곳 알바니아에서는 우리가 신이다! 우리는 신권 통치를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희 하느님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으며 너희나 너희 신은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좋은 소식을 계속 전하였습니다.

1946년에 선거가 의무화되면서, 감히 기권을 하는 사람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집회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며, 전도 활동은 범죄 행위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대응하였습니까?

1947년에, 티라나에 있는 약 15명의 형제들은 특별 전파 활동을 조직하였지만, 즉시 체포되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성서는 찢겨졌고, 그들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석방될 때, 그들은 경찰이 동행하지 않는 한 아무데도 여행할 수 없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신문에는 예수와 여호와를 조롱하는 기사들이 실렸습니다.

보스턴에 있는 알바니아 형제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1947년 3월 22일에 알바니아 현지의 여호와의 증인을 대신하여 엔베르 호자에게 두 페이지에 걸친 정중한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정부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으며, 우리의 출판물이 종교적 반대자들의 비그리스도인 행위를 정당하게 폭로하기 때문에 그들이 거짓 비난을 조장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편지는 이러한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카포 씨가 이끄는 알바니아 대표단이 국제 연합에 파견되어 보스턴에 왔을 때, 우리는 카포 씨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갔습니다. 카포 씨는 우리를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으며, 아무런 편견 없이 우리의 소식을 들어 주었습니다.” 회스니 카포는 알바니아에서 여러 해 동안 최고위 관리로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에서 문제는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1947년에 알바니아는 소련, 유고슬라비아와 동맹을 맺는 한편, 그리스와는 대립하였습니다. 이듬해에 알바니아는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끊고,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였습니다. 정부 이념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사회에서 배척을 당했습니다. 형제들의 중립 입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반대와 적개심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일례로, 1948년에 6명의 형제 자매들이 기념식을 갖기 위해 작은 마을에서 함께 모였습니다. 그 모임에 경찰이 들이닥쳐, 몇 시간 동안 전도인들을 구타한 뒤 풀어 주였습니다. 몇 주 후에, 경찰은 기념식 연설을 한 형제를 체포하여 12시간 동안 선 채로 있게 하였습니다. 한밤중에 경찰서장은 쏘아붙이듯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왜 법을 어겼나?”

형제는 “우리는 나라의 법을 주님의 법보다 우선시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화가 난 경찰서장은 형제의 뺨을 때렸는데 형제가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자, “이게 뭐 하는 짓인가?”라고 물었습니다.

형제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는 누가 우리를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화가 치민 경찰서장은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희 주가 그렇게 시켰다니, 그 말대로 해 줄 순 없지. 더 이상 때리지 않겠다! 여기서 나가!”

‘저는 계속 전도할 겁니다’

소티르 체치는 티라나에 사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습니다. 어렸을 때 뼈에 결핵이 생긴 소티르는 다리에 통증이 심했습니다. 17세가 되었을 때에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자살을 시도하기 얼마 전에, 친척인 레오니다 포프가 찾아왔습니다. 소티르가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던 레오니다는 예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으며, 땅이 낙원으로 변모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티르에게 그리스어 성경을 한 권 주었습니다. 소티르는 즉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소티르의 말은 이러합니다. “누군가가 목마른 나에게 시원한 물을 부어 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소티르는 레오니다와 그 이후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며칠도 안 되어 이렇게 추리하였습니다. ‘성서에서는 예수께서 전파하셨다고 했어. 사도들과 제자들도 모두 전파했지. 그렇다면 분명 나도 그렇게 해야 돼.’

그래서 소티르는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손에는 그리스어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발을 짚고 용기 있게 호별 방문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시구리미 즉 국가 보안국에서 국가 안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보안국 요원들이 공산주의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항상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 있게 전파하던 소티르가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티르를 체포하여 몇 시간 동안 감금하고 구타한 다음, 전파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소티르는 풀려난 뒤에 레오니다에게 연락을 하였고, 레오니다는 소티르를 스피로 카라야니에게 데려갔습니다. 스피로는 몇 년 전에 진리를 배워 알게 된 의사였습니다. 스피로는 소티르를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티르가 진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스피로는 소티르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다시 체포되는 상황이 오면, 어떤 문서이든지 서명하기 전에 단어와 행을 하나하나 세어 보고 각 단어 뒤에는 줄을 그으세요. 여백을 남겨서는 안 돼요. 그리고 모든 내용을 꼼꼼히 읽으세요. 서명할 문서의 내용이 자신의 말한 바와 동일한지 확인하세요.”

겨우 이틀 뒤에 경찰은 전파하던 소티르를 다시 체포했습니다. 그러고는 경찰서로 연행하여 진술서에 서명하게 하였습니다. 막 서명하려던 순간, 소티르는 스피로의 조언이 생각났습니다. 경찰이 빨리 서명하라고 강요했지만, 소티르는 서두르지 않고 모든 내용을 읽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문서에 서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만약 제가 이 문서에 서명하면, 거짓말한 셈이 됩니다.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몇 시간 동안 소티르에게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강제로 두 가닥의 전선을 잡게 한 다음, 반복해서 전기 충격을 가해 고통을 주었습니다.

나중에 소티르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가 없자, 나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서장이 서 있더군요. 경찰서장은 힐끗 보더니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멈춰!’라고 명령하면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나!’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문이 불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고문을 그만두었지만, 문서에 서명하라고 계속 강요하였습니다. 그래도 소티르는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네가 이겼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못해, 경찰은 소티르가 말하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하였고 소티르는 진술서를 통해 훌륭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경찰은 작성한 문서를 소티르에게 주었습니다. 여러 시간 구타를 당하고 전기 고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티르는 모든 내용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소티르는 글을 삽입할 만한 여백이 남은 곳에는 줄을 그었습니다.

경찰관들은 깜짝 놀라 “너, 도대체 그런 거 어디서 배웠어?” 하고 물었습니다.

소티르는 “내가 하지 않은 말에는 서명하지 말라고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경찰은 빵 한 쪽과 치즈 한 조각을 소티르에게 건네면서 “좋아, 그러면 이건 누가 준 거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는 밤 9시쯤이었는데, 소티르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여호와가 준 건가? 아니야, 우리가 준 거라고” 하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돌보아 주시죠. 그분이 방금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신 겁니다”라고 소티르가 대답하였습니다.

자포자기한 경찰들은, “널 풀어 주겠다. 하지만 또다시 전도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풀어 주지 마세요. 저는 계속 전도할 테니까요.”

경찰은 “여기서 있던 일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돼!”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소티르가 대답했습니다.

경찰은 “잔말 말고, 나가!”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소티르 외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소티르는 이 믿음의 시험을 겪은 뒤에 마침내 침례를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편지는 검열당했으며, 대략적인 보고만 이따금씩 알바니아 외부로 흘러나왔습니다. 여행을 하거나 집회에 참석하기가 점점 더 위험해지면서, 전국 각지의 형제들 간에 연락이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심 조직이 없다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했습니다. 1940년에 알바니아에는 50명의 형제 자매가 있었는데, 1949년에는 71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정치적 긴장 속에 이룬 신권적 증가

1950년대에는 생활의 모든 부면에 걸쳐 정부의 통제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리스와 알바니아 사이의 정치적 긴장감은 점점 더 고조되었습니다. 미국, 영국과의 외교 관계는 전무한 상태였으며 소련과의 관계마저 긴장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고립된 알바니아는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끊고 모든 연락 내용을 면밀히 감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명의 형제가 스위스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와 엽서를 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스위스 형제들은 암호화된 표현을 사용하여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로 답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엽서들을 통해, 알바니아 형제들은 1955년에 열린 뉘른베르크 대회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히틀러 정권이 막을 내려 독일 형제들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소식은 알바니아 형제들이 믿음 안에서 확고함을 유지하는 데 힘이 되었습니다.

1957년 무렵에, 알바니아에서는 75명의 전도인을 보고하였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었지만, 「1958 연감」에는 “상당수의” 사람이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알바니아 형제들이 여전히 전파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보고가 실렸습니다.

「1959 연감」의 보고는 이러합니다. “이 충실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진리를 전하였으며 일부 출판물을 발행하려 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주 접하지는 못해도, 때를 따라 받은 양식을 감사히 여기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 통치자들이 외부 세계와의 모든 연락을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보고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나라의 통치자들이 알바니아의 형제들을 신세계 사회의 다른 성원들로부터 격리시켜 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느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작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계속된 고난

당시에 사람들은 모두 군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직장을 잃거나 투옥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나쇼 도리와 야니 코미노는 또다시 몇 달간 투옥 생활을 했습니다. 직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타협한 사람들도 소수 있었지만, 견고한 구심점을 이룬 충실한 형제들은 1959년에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많은 형제 자매들은 여전히 두려움 없이 전파하였습니다.

1959년에 법무부가 해체되었으며, 변호사들은 더 이상 영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산당이 직접 모든 법규를 제정하고 적용하였습니다.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이 팽배한 시기였습니다.

알바니아 형제들은 국외로 소식을 보내어, 자신들이 큰 시련을 겪고 있지만 충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전달하였습니다. 한편, 브루클린 세계 본부에서는 알바니아의 형제들과 연락을 취하려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알바니아 남부에서 태어나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존 마크스는 알바니아 비자를 신청해 보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1년 반 후에, 존은 알바니아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인 헬렌은 비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존은 1961년 2월에 두러스에 도착하여 티라나로 여행했습니다. 그곳에서 진리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는 여동생 멜포를 만났습니다. 여동생은 바로 다음 날 형제들과 연락이 닿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존은 형제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으며, 가방 속에 몰래 만들어 놓은 공간에 숨겨 온 얼마의 출판물을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가슴이 벅찼습니다. 24년이 넘도록, 다른 나라에서 형제가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존의 추산에 의하면, 5개의 도시에 60명의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보다 작은 마을들에도 소수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티라나에서 형제들은 매주 한 번씩 일요일에 몰래 모여, 1938년부터 숨겨 온 출판물들을 검토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여호와의 조직과 연락이 거의 없었던 알바니아 형제들은 조직적인 문제와 최근에 밝혀진 진리에 대한 최신 지식을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들 뿐만 아니라 자매들도 집회를 사회하고 심지어 집회에서 공개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존은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형제들은 자매들이 조정된 마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염려가 되고 확신이 서지 않아, 그 점을 자매들에게 개인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나는 부탁대로 했고 자매들이 그러한 마련을 받아들여 매우 기뻤습니다.”

이 충실한 종들은 가난 속에서도 왕국 활동을 열심히 지원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존이 알게 된 인상 깊은 사례로서, 기로카스터르에서 온 연로한 두 형제들은 “가진 돈이 얼마 없는데도 협회에 헌금하기 위해” 절약을 하여 “일정 금액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금화로 100달러가 넘는 금액을 모았습니다.

티라나의 형제들은 금지령하에서도 회중을 운영하는 방법에 관한 지침이 담겨 있는 「평화와 연합 가운데 전파하고 가르침」(Preaching and Teaching in Peace and Unity) 소책자를 받고 감사해하였습니다. 그 후 3월에 존은 티라나에 있는 레오니다 포프의 집에서 기념식을 열었는데, 37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존은 연설을 마치자마자 그리스로 돌아가는 배를 탔습니다.

본부의 형제들은 알바니아를 방문한 존의 보고를 고려한 후, 레오니다 포프와 소티르 파파와 루치 제카를 임명하여 티라나 회중과 알바니아의 활동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피로 브루호를 순회 감독자로 임명하여 회중들을 방문하고 저녁마다 형제들과 모임을 열어 연설을 하고 출판물의 내용을 설명하게 했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은 알바니아의 형제들이 영적으로 점점 더 강화되고 최신 지식을 접하도록 돕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편물이 철저한 검열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직에서는 그러한 지침이 담긴 공식적인 편지를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존은 출판물의 페이지를 가리키는 암호를 사용하여 알바니아의 형제들에게 정보를 조금씩 전달했습니다. 이내 돌아온 보고들을 보면 형제들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티라나에 있는 3명의 형제들은 전국 위원회의 역할을 하였고, 스피로는 정기적으로 회중들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알바니아 형제들은 야외 봉사 보고를 본부로 보내기 위해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하였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외국에 있는 특정 형제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매우 가느다란 펜으로 암호화된 보고를 적고 그 위에 우표를 붙였습니다. 예를 들면, 「전파하고 가르침」 소책자에서 “전도인”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페이지를 엽서에 적은 다음, 그 달에 보고한 전도인의 수를 그 옆에 적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외국의 형제들은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알바니아에 있는 형제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시작은 순탄했지만 어려움이 닥치다

전국 위원회가 순결한 숭배를 증진시키기 위해 힘써 노력했지만, 이내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1963년에 멜포 마크스는 오빠인 존에게 편지하여, 전국 위원회를 구성하던 세 명의 형제 중 두 명인 레오니다 포프와 루치 제카가 “가족을 떠나 먼 곳에 있으며” 집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고 알려 왔습니다. 나중에는, 스피로 브루호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과 함께, 타르수스의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보내는 내용이 나오는 사도 8:1, 3을 언급하면서 레오니다 포프와 루치 제카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레오니다 포프, 루치 제카, 소티르 체치는 공장에서 일하였는데, 그곳에서는 공산당원이 모든 작업자들을 상대로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강연을 했습니다. 하루는, 진화에 관한 강연을 듣던 도중에 레오니다와 루치가 일어나 “아닙니다!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이 아닙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가족과 떨어져 먼 도시로 유배되어 노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이러한 처벌을 인테르님(감금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루치는 그람슈 산지로 호송되었습니다. 당국은 레오니다를 “총책임자”로 여겨 바위투성이에다 날씨가 추운 부렐 산지로 보냈습니다. 레오니다는 7년이 지난 뒤에야 티라나에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964년 8월 무렵에 집회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알바니아에서 이따금씩 흘러나온 정보에 의하면, 형제들은 시구리미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표를 뗀 자리에서 발견한 한 소식은 이러하였습니다. “주께 기도 요망. 집집에서 출판물 압수. 연구 저지. 세 명 인테르님 당함.” 글을 적고 그 위에 우표를 붙이는 것을 아는 사람은 포프 형제와 제카 형제밖에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이 풀려난 줄로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식은 제카 형제의 아내인 프로시나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인도하는 책임을 맡은 형제들이 유배되어 있었고 그 밖의 형제들은 시구리미의 끝없는 감시 때문에 서로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인테르님에 처한 형제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훌륭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람슈 사람들은, “운질로르[복음 전파자]가 왔대. 군대는 안 가지만, 우리 고장에서 다리를 만들고 발전기를 수리하는 사람들이지”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충성스러운 이 형제들은 훌륭한 평판을 얻었으며, 그러한 평판은 수십 년간 유지되었습니다.

무신론 국가가 탄생하다

정치 노선에 있어서 알바니아는 소련과의 관계를 끊고 중국과의 동맹을 한층 더 강화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이 점점 더 인기를 끌면서, 일부 알바니아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1966년 무렵 엔베르 호자는 군대 내의 계급을 없앴으며, 서로를 불신하는 분위기 속에서 반대 의견은 일절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국영 신문들은 종교를 “위험 요소”라고 부르면서, 종교를 비판하는 기사들을 발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두러스에서 일단의 학생들이 불도저로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뒤이어 종교 건물들이 삽시간에 여러 도시에서 잇달아 파괴되었습니다. 1967년에 정부가 반종교적 감정을 부추기는 가운데, 알바니아는 최초의 철저한 무신론 국가가 되었습니다. 다른 공산 국가들은 종교를 통제하는 수준이었지만, 알바니아는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이슬람교·정교회·가톨릭 성직자들이 정치적인 활동을 벌이다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문제를 겪지 않았는데, 신앙 생활을 순순히 접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몇몇 역사적인 종교 건물은 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나 성화나 모스크나 이슬람교 첨탑과 같은 종교적 상징물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말은 경멸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형제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일부 형제들이 사망하였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남아 있던 전도인들은 여전히 최선을 다해 진리를 옹호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매우 두려워하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1968년에 골레 프요코는 존 마크스와 헬렌 마크스에게 자신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고 편지하였습니다. 전파 활동은 불법이었고, 집회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당시에 80대이던 골레는 자신이 벗들에게 그리고 시장, 공원, 커피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 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레는 충실을 유지한 가운데 사망하였습니다. 다른 수많은 알바니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와 진리에 대한 그의 넘치는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령의 나이로 인해, 스피로 브루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순회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969년 초에 그가 우물 밑바닥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시구리미는 그가 자살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습니까?

스피로가 자살하면서 남겼다고 하는 메모에는 우울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그의 필체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스피로는 사망하기 전에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 주위에는 사건의 실마리가 될 만한 검은 멍 자국이 있었는데, 모종의 가해 행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물에는 목을 맬 만한 밧줄이 발견되지 않았고, 시신의 폐에는 물이 차 있지도 않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스피로가 투표를 하지 않으면 가족과 함께 투옥되고 식품을 배급받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티라나의 형제들은 스피로가 선거 전날에 살해당해 우물에 던져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죽음을 자살로 허위 보고한 경우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고립된 십 년

1971년에 전 세계의 여호와의 증인은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통치체 성원의 수가 늘어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장로와 봉사의 종을 임명하는 마련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알바니아의 형제들은 조정된 이러한 조직적 마련에 관해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하게 된 것도 그나마 미국에서 관광객으로 방문한 증인들이 티라나에 있는 로피 블라니 자매와 잠시 접촉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증인들은 집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도시에 실제로 더 많은 증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활동하는 증인은 3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스타 다베는 자신의 고국인 알바니아로 돌아갈 비자를 받으려고, 1966년 이후로 그리스에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76세였던 그는 자녀들에게 진리를 전해 주고 싶어 했습니다. 비자를 받을 수 없었던 코스타는 두 번 다시 알바니아 밖으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바니아 국경에서 미국 여권을 제출하고 입국했습니다.

1975년에, 미국에서 어느 한 알바니아인 부부가 관광객으로 알바니아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시가 “이전 어느 때보다 철저”했으며, 여호와의 증인은 요주의 대상이라고 편지하였습니다. 외국인은 어딜 가든 공식 관광 안내인과 동행해야 했는데, 안내인 중 상당수가 시구리미의 일원이었습니다. 시구리미는 외국인이 떠나면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관광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의심을 받았고 환대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외국인을 두려워했습니다.

코스타 다베는 1976년 11월에 보낸 편지에서 블로러에서 행해진 기념식에 5명이 참석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퍼르메트와 피에르 두 도시에서 각각 1명의 증인이 혼자서 기념식을 지킨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티라나의 경우, 한 곳에서는 2명이, 다른 곳에서는 4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아는 한, 1976년에 행해진 기념식에는 적어도 13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쿨라 지다리는 자신이 기념식을 어떻게 지켰는지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아침에 나는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꺼냈습니다. 그날 저녁에 커튼을 친 다음, 변기 뒤에 숨겨 둔 성서를 꺼내서 예수께서 기념식을 제정하시는 내용이 나오는 마태 26장을 읽었어요. 기도를 한 다음, 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습니다. 그러고는 마태의 내용을 조금 더 읽고 다시 기도한 다음, 포도주를 들었다가 내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노래를 불렀지요. 비록 그 자리엔 나밖에 없었지만, 나는 전 세계의 형제들과 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쿨라에게는 친족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래전에, 쿨라는 어렸을 때 스피로 카라야니의 집에 입양되어 스피로와 그의 딸인 페넬로피와 함께 티라나에서 살았습니다. 스피로는 1950년 무렵에 사망했습니다.

더욱더 고립된 알바니아

1978년에 알바니아는 중국과의 동맹 관계를 끊음으로 새로운 고립의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알바니아는 온전한 자주 자립의 능력을 갖춘 나라가 되는 것을 목표로 헌법을 새로 개정하였으며, 연극, 발레, 문학, 미술 등 생활의 모든 부면을 통제하는 엄격한 지침을 제정하였습니다. 선동적이라고 여겨지는 고전 음악은 금지되었습니다. 허가받은 작가들만 개인 타자기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방송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잡힌 사람은 누구나 시구리미에게 심문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심한 탄압을 받는 가운데 독일, 미국, 스웨덴, 스위스, 오스트리아에서 온 형제들이 알바니아 형제들과 접촉하기 위해 관광객으로 방문하였습니다. 그들과 접촉한 몇몇 사람들은 그러한 노력에 대해 진정으로 고마워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형제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문객이 왔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1985년에 알바니아 사람들은 독재자로서 장기 집권했던 엔베르 호자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머지않아 정부와 사회에 변화가 일 것이었습니다. 이듬해에 존 마크스가 사망하였으며, 존의 아내인 헬렌이 알바니아를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헬렌은 60대 중반의 나이였습니다. 당국은 비자를 받으러 온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한다 해도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 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2주간에 걸친 헬렌의 여행은 알바니아에 있던 소수의 전도인들에게 매우 뜻 깊은 방문이었습니다. 헬렌은 마침내 시누이인 멜포와 상봉했는데, 멜포는 25년 전에 오빠에게서 진리를 전해 들었습니다. 멜포는 아직 침례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여러 해 동안 조직을 위한 주요 연락책 역할을 하였습니다.

헬렌은 또한 레오니다 포프와 1960년에 침례를 받은 바실 조카를 만났습니다. 헬렌은 알바니아의 여러 지역에 아직 7명의 증인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헬렌은 알바니아 형제들에게 다른 공산 국가에서 활동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그리고 조직에 관한 최신 정보를 알려 주었습니다. 헬렌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비공식 증거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알바니아 경제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헬렌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우유를 배급받기 위해 새벽 3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예삿일이었어요. 많은 상점에는 물건이 없었죠.”

1987년에 오스트리아 지부는 그리스 지부와 공조하여 다른 증인들이 알바니아를 방문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1988년에 오스트리아의 페터 말로바비츠와 그의 아내는 관광객으로 방문하여 멜포에게 블라우스를 주었습니다. 멜포는 블라우스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쁜 선물은 블라우스 안에 숨겨진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 책이었습니다.

그해에 다른 부부가 멜포와 만나 더 많은 출판물을 전달하려 했는데, 시구리미가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하였습니다. 소위 공식 안내인들이 방문객들을 몇 분간 방치한 틈을 이용하여 잠깐 만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레오니다의 건강이 좋지 않으며, 알바니아의 다른 많은 형제들은 고령인 데다 자유롭게 이곳저곳 다니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다

1989년에는 정치적인 변화의 바람이 일었습니다. 알바니아를 탈출하다가 잡힌 사람들에게 선고되던 사형이 폐지되었습니다. 헬렌은 그해 여름에 다시 알바니아를 방문했습니다. 헬렌은 전달하도록 위임받은 정보와 지침을 몇 시간에 걸쳐 전했습니다. 바실 조카는 가능한 대로 형제들을 잠깐씩 방문하였습니다.

시구리미는 헬렌이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잠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기는커녕 미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하나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어느새 달라진 것입니다!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알바니아도 곧 영향을 받았습니다. 1990년 3월에는 카바여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기 위해 티라나에 있는 외국 대사관들에 몰려들었습니다. 학생들은 개혁을 요구하면서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1991년 2월에는 대규모의 군중이 오랜 세월 티라나의 스칸데르베그 광장에 우뚝 서 있던 10미터 높이의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렸습니다. 알바니아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독재자는 사라졌습니다. 3월에는 약 3만 명의 알바니아 사람들이 두러스와 블로러에서 배들을 빼앗아 이탈리아로 망명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복수 정당이 참여한 선거가 그달에 치러졌습니다. 비록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정부가 영향력을 잃어 가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헬렌 마크스는 1991년 8월에 마지막으로 알바니아를 방문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바로 한 달 전에 정부가 종교부를 개설하고 24년 만에 종교 활동을 다시 합법화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지체하지 않고 전파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회중 집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바실 조카는 그리스로 가서 지부 사무실에 머물면서 전파 활동을 조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바실이 그리스어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바니아어를 조금 할 줄 아는 형제들이 최선을 다해 그를 가르쳤습니다. 티라나로 다시 돌아온 바실은 배운 것을 주의 깊이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막 발표된 알바니아어판 「파수대」를 연구하는 집회를 포함한 두 가지 주간 집회를 더 잘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예전에는 오래된 형제들이 가르쳐 준 곡으로 노래를 부르고 기도로 집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연구를 하고 나서 마치는 노래를 불렀는데, 때로는 두세 곡 이상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기도로 집회를 마쳤지요.”

1991년 10월과 1992년 2월에 토마 자피라스와 실라스 토마이디스가 그리스에서 알바니아로 출판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티라나에 있는 형제들과 베라트에 있는 침례 받지 않은 전도인들을 만나, 진리를 배우는 데 도움이 필요한 여러 관심자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영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베라트에서는 침례 받은 형제가 전혀 없는데도 관심자들이 집회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뜻밖의 임명

마이클 디그레고리오와 린다 디그레고리오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에 보스턴에서 침례 받은 마이클의 조부모는 알바니아인이었기 때문에, 마이클은 어느 정도 알바니아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 1992년에 디그레고리오 부부는 알바니아에 있는 친족들을 방문하기로 했는데, 자신들이 그곳에 3일간 머무는 동안 형제들을 만나도 되는지 통치체에 문의하였습니다. 뜻밖에도, 통치체는 그들에게 알바니아에 3개월 동안 머물면서 전파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형제들이 로마에 위치한 지부에서 디그레고리오 부부에게 알바니아의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으며, 바실 조카를 비롯한 몇몇 알바니아 형제들의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디그레고리오 부부는 1992년 4월에 비행기를 타고 티라나로 갔는데, 알바니아에서는 교포들이 다시 환영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요 사태는 여전히 빈번했으며,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마이클과 린다가 공항에서 나오자, 마이클의 친척들이 달려와 그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마이클은 사진으로 본 바실 조카를 알아보았습니다. 바실도 디그레고리오가 그날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것입니다.

마이클은 린다에게 “금방 따라갈 테니까, 당신은 먼저 친척들과 함께 가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친척들은 린다와 포옹하고 나서, 디그레고리오 부부의 짐을 챙겨 서둘러 자동차로 갔습니다. 그사이에 마이클은 재빨리 바실에게 갔습니다.

마이클은 바실에게 서둘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요일에 티라나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찾아뵙도록 하죠.”

마이클과 린다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마이클의 알바니아 친척인 코초가 달려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알바니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코르처로 가면서, 디그레고리오 부부는 이 나라의 상황이 카리브 해 지역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이클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모든 것이 낡았고 누렇거나 잿빛이었으며 먼지가 뒤덮여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사람들은 침울해 보였습니다. 주변에서 차를 찾아보기가 어려웠으며, 창문들은 깨져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일일이 손으로 밭을 경작했습니다. 우리 조부모님이 살던 시대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더군요!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여행’

코초는 오랫동안 숨겨 놓았던 것을 마이클에게 보여 주고 싶어 했습니다. 마이클의 할머니가 사망했을 때, 보스턴에 있던 가족은 알바니아에 있는 식구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처음 열 페이지에는 주로 가족 이야기가 적혀 있었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부활에 대해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코초는 마이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경찰이 이 편지를 검열했는데,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지루하니까, ‘가져가! 온통 가족 이야기뿐이잖아!’라고 하더군. 나는 뒷부분에 적힌 내용을 읽다가, 하느님에 관해 나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마이클은 자기 내외가 여호와의 증인임을 밝히고 코초에게 철저히 증거했습니다.

마치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바니아 사람들은 자신의 손님을 챙기고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초는 마이클과 린다에게 자신도 꼭 티라나에 따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이클은 이렇게 기억합니다. “거리 표지판이 없었기 때문에, 티라나에서 바실의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코초가 우체국에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린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코초가 우체국에서 돌아왔는데, 꽤 놀란 표정이었어요. 우리는 차를 타고 곧장 바실의 집으로 갔어요.”

나중에 코초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체국에 들어가서 바실에 대해 물었더니, 사람들이 ‘그분은 성인군자 같은 분이에요! 그분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세요? 티라나에서 그분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어요!’라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친척을 하느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였다는 걸 직감했지! 이건 내가 방해해서는 안 될 일이야!”

티라나에서 조직을 갖추다

바실은 디그레고리오 부부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녁이 되서야 바실은 나쇼 도리와 함께 투옥되었던 야니 코미노가 그날 아침에 사망하였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바실이 사랑하는 형제이자 절친한 벗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집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통치체에서 보낸 사람이 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마이클과 린다는 티라나에 머물러야 했지만, 당시 정권은 도시 내에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마이클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여호와의 손에 맡겼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작은 아파트에 있는 숙소를 구해, 그리로 이사하였습니다.”

린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집주인들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어요. 더구나, 우리 집으로 가려면 다른 사람의 집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집이 외진 곳에 있었고 우리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은 숙소였습니다.”

디그레고리오 부부는 장시간에 걸쳐 티라나에 있는 오래된 형제들로부터 그들이 인내해 온 시련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오래된 형제들 중 일부가 서로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개개인은 충성스럽게 살아왔지만, 다른 형제들도 충실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로 거리를 두던 일부 형제들도 우리를 멀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문제를 차분히 논의한 끝에,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사랑으로 연합되어 앞으로 있을 일을 고대하였습니다.”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회중이 없음이 분명하였습니다. 일례로, 「날마다 성경을 검토함」 소책자를 처음 본 쿨라 지다리와 스타브리 체치는 책을 훑어보면서도 무슨 책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스타브리가 “어, 이건 만나잖아!”라고 소리쳤습니다. 자신이 진리를 배웠을 당시에 사용하던 「믿음의 가족을 위한 일용할 천적 만나」 책이 생각난 것이었습니다.

“저, 그런데 협회장 노어 형제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노어 형제의 친구인 프레드 프랜즈도 잘 지내고 계시지요?”라고 쿨라가 물었습니다. 이런 걸 보면,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기념식!

보통, 형제들은 바실 조카의 집에 딸린 가로 3미터, 세로 4미터 크기의 방에서 집회를 보았는데, 기념식을 갖기에는 공간이 턱없이 협소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때 공산당 신문을 발행하는 본부로 사용되던 방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105명이 참석했습니다. 티라나에서 개인 집이 아닌 곳에서 기념식을 갖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1992년에 알바니아에는 전도인이 30명밖에 없었는데, 기쁘게도 325명이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티라나의 관심자들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바실의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 많게는 40명이 참석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 중에는 침례 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침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침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모임을 갖는 데 여러 시간을 바쳤습니다. 「우리의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됨」 책이 알바니아어로 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들은 침례 지원자들을 위해 모든 질문을 즉석에서 번역하여 물어봐야 하였습니다.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연구가 사회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성서 연구를 해 본 적이 전혀 없었는데도, 관심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법적 인가를 받다!

그 후 몇 주 동안 형제들은 변호사 그리고 관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왕국 전파 활동을 법적으로 등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티라나에 있는 일단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이미 정식으로 신청을 한 적이 있지만, 새로운 정부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끈기 있게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 모든 일을 했지요. 우리는 시내에서 길을 걷다가 인권부 장관,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경찰청장, 헌법 재판소 재판관 등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우연히 마주치곤 했습니다. 그들은 호의적이었고, 규제가 완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좋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운질로르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알바니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엄연히 존재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에게 법적 인가를 내줄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러 주가 지나도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알바니아 집안 배경을 가진 안젤로 펠리오 형제가 티라나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러 미국에서 왔을 때 돌파구가 열렸습니다. 안젤로는 알바니아에 머무는 동안 형제들과 함께, 인가를 내줄 권한을 가진 장관의 법률 고문을 찾아갔습니다. 고문은 안젤로의 가족이 자신과 같은 지방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반가워하였습니다.

법률 고문은 안젤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족 분들이 어느 마을 출신이시죠?” 놀랍게도, 그들은 둘 다 같은 마을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면 성씨는 어떻게 되시죠?”라고 고문이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공교롭게도 안젤로는 고문의 친척이었으며, 여러 해 전에 가족들 간에 연락이 끊긴 것이었습니다.

고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출하신 정관을 살펴보았는데 인상적이더군요. 그래서 안 그래도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안 도와 드릴 수가 없겠네요!”

며칠 후에 법률 고문은 형제들에게 알바니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법적으로 인가하는 법인 설립 허가서 제100호를 건네주었습니다. 마침내, 1939년 이후로 금지령 아래 있던 참하느님 여호와에 대한 숭배가 이제는 법적으로 인가되면서 모든 제재가 풀린 것입니다! “그날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디그레고리오 부부는 말했습니다.

알바니아를 감독하던 그리스 지부에서는 몇 주 후에 로버트 컨을 보내 티라나를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로버트는 현지 형제들에게 활동이 인가되었으며 회중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또한 회중 구역이 “알바니아 전역”이라는 사실도 공지해 주었습니다.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을 조직적으로 정말 열심히 수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티라나에서는 선교인 집과 사무실로 사용할 목적으로 침실 세 개가 있는 집을 임대하였습니다. 그 집에는 최초의 왕국회관으로 사용할 수 있는 큰 방이 딸려 있었습니다.

고립되어 있던 양을 발견하다

알바니아에서 행해지는 전파 활동의 진척 상황에 대해 토의하던 중에 형제들은 “블로러에는 증인이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치매에 걸렸다는 연로한 자매 한 사람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자신과 가족이 운질로르이며, 블로러에서 아레티라는 사람에게 진리를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티라나의 형제들은 아레티를 찾기 위해 블로러로 갔습니다.

키가 작고 연로한 부인인 아레티 피나는 형제들을 집 안으로 맞이하기는 하였지만, 다소 경계하는 눈치였습니다. 형제들이라고 신분을 밝혔는데도, 아레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분이 흐른 뒤에, 갑자기 아레티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될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삼위일체를 믿으시나요? 하느님의 이름은 무엇이죠? 지옥불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죠? 이 땅은 어떻게 될까요? 하늘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죠?”

형제들은 모든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레티가 물었습니다. “전도를 하시나요?”

“네, 전도합니다”라고 한 형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레티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전도하시나요?”

그러자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호별 방문을 하면서 전도합니다.”

아레티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 형제를 껴안았습니다.

그러고는 감격스러운 듯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야 형제들이라는 걸 알겠어요! 호별 봉사를 하면서 전파하는 건 여호와의 백성밖에 없으니까요!”

아레티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블로러의 프로테스탄트 단체들이 자신들의 단체에 가입하라고 아레티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레티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큰 바빌론과는 어떠한 관련도 맺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진정한 나의 영적 가족인지 확인해야 했던 거예요!”

아레티는 1928년에 18살의 나이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걸어서 산악 지역을 오르내리며 성서를 가지고 전파했습니다. 오랫동안 형제들과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도 아레티는 줄곧 혼자서 충실하게 전파했습니다.

아레티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대단한 분이시지요. 저를 잊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사람들은 아레티가 알바니아의 엄격한 전체주의 통치하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자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레티는 치매에 걸린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할 일이 많다!

우리의 활동이 법적으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알바니아에서는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았습니다. 형제들은 최신 지식을 갖추고 영적으로 강화되어야 했습니다. 형제들을 위해 그리고 야외에서 사용하기 위해 알바니아어 출판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전파자들이 긴급하게 필요하였습니다. 누가 그러한 도움을 베풀 것이었습니까?

1992년에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와서 알바니아어 학습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소규모의 번역 팀이 우리 출판물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길게는 21일 내내 전기가 나간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도, 형제들은 유머감을 잃지 않았으며 맡겨진 일을 부지런히 수행하였습니다.

고된 일도 많았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선교인 집을 따뜻하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알바니아에서는 땔나무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난방을 어떻게 할 것이었습니까? 그리스의 형제들은 도움을 베풀어 상당량의 땔나무와 전기톱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장작 난로의 입구가 매우 좁았고 전기톱을 작동할 전기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한 형제의 친구가 도끼를 가지고 있었는데, 같은 티라나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도끼를 선교인 집으로 가져오려면 2시간이 걸렸는데, 그것도 날이 저물기 전까지 도끼를 돌려주어야 하였습니다. 한 선교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도끼가 있는 동안, 우리는 모두 교대로 장작을 팼습니다. 덕분에 추위는 피했답니다!”

장작을 패고 언어 학습반을 진행하던 시기에, 현재 뉴욕 주 패터슨에 있는 번역 봉사부에서 닉 알라디스와 에이미 알라디스가 처음으로 알바니아어 번역 팀을 방문했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있었던 알라디스 부부의 방문은 번역 팀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번역자들은 알라디스 부부의 친절하고 균형 잡힌 태도를 통해 큰 도움을 받아 신속하게 일을 배워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지부는 출판물을 인쇄하여 알바니아로 보내 주었습니다.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에서 얻는 훌륭한 반응을 고려해 볼 때, 그와 같은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전도인들 역시 열심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예를 들어, 롤라는 봉사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매달 150시간이나 200시간 또는 그 이상 되는 시간을 야외 봉사에 바쳤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서 봉사하라는 조언을 듣자, 롤라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여태까지 인생을 허비하며 살았어요! 이보다 더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활동이 진전되다

1993년 3월은 알바니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달이었습니다. 그 달에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베라트, 두러스, 기로카스터르, 슈코더르, 티라나, 블로러와 같은 새로운 임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알바니아어 번역 팀이 처음으로 번역한 3월 1일호 「파수대」가 발행되었습니다. 또한 첫 신권 전도 학교 집회가 열려 처음으로 다섯 가지 집회를 모두 보았으며, 알바니아어로 된 「우리의 왕국 봉사」가 처음으로 발행되었고, 티라나의 스칸데르베그 광장에 있는 발레·오페라 극장에서 최초로 특별 대회가 열렸습니다.

역사적인 이 특별 대회일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대표자들이 왔습니다. 나쇼 도리는 대회를 시작하는 기도를 하면서,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축복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참석자는 585명에 달하였으며, 41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알바니아에서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겨 온 형제들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도 있었습니다.

알바니아에서 감격스러운 첫 지역 대회가 1993년에 열렸습니다. 그리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온 대표단을 포함하여 600명 이상이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알바니아 형제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고립되어 있다가,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형제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통치체는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나쇼 도리와 비토 마스트로로사와 마이클 디그레고리오를 전국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 지부의 감독 아래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사무실과 점차 늘어나는 번역 팀을 위한 건물과 부지를 물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온 일단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알바니아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이탈리아에서 온 스테파노 아나트렐리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5주 동안 언어를 배운 후에, 사무실로 오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이러한 말을 들었습니다. “순회 감독자로서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집단들을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처음에 스테파노는 “저는 알바니아어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데요!” 하고 대답하긴 했지만, 이 임명이 과분하고도 영예로운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스테파노는 몇 개의 연설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받고 나서 알바니아의 여러 지역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스피로 브루호가 금지령하에서 순회 감독자로 형제들을 방문한 지 약 3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1995년에 스테파노는 전국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94년에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일단의 파이오니아들이 알바니아에 왔습니다. 이 파이오니아들의 열심은 새로운 알바니아 전도인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1994 봉사 연도 말에는 354명의 전도인들이 전파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전도인들은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매우 압제적인 제도에서 살다가 자유가 넘치는 사회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 특히 외국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국 형제 자매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였으며, 새로운 전도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습니다.

그해에, 연로한 형제 자매들과 새로운 전도인들은 통치체 성원으로는 최초로 알바니아를 방문한 시어도어 재라스를 만나게 되어 기뻐하였습니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티라나에 600여 명이 모였습니다.

한편, 티라나에 사무실로 사용할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6개월도 되지 않아, 열심히 일하는 외국 형제들로 이루어진 건축 팀이 오래된 건물을 현대식 사무실로 개조하였으며, 24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를 신축하였습니다. 1996년 5월 12일에 봉헌식이 열렸고 통치체 성원인 밀턴 헨첼이 알바니아를 방문했습니다.

혼자서 전파하다

코르처에 사는 아르벤이라는 청년은 누나가 보내 준 성서 출판물을 읽고 자신이 읽은 내용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알바니아 사무실에 편지를 썼으며, 한동안 형제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계속 진리를 배워 나갔습니다. 더 많은 영적인 도움을 베풀기 위해 두 명의 형제들이 특별히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아갔습니다. 아르벤과 대화를 나누어 보니, 그가 전도인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두 형제는 그를 코르처의 중심가로 데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봉사하는 모습을 관찰하게 하였습니다.

아르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은 나에게 잡지를 주면서 ‘자, 이제 해 보세요’라고 하더군요. 형제들이 나에게 혼자 해 보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를 도와줄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몇 달 후에야 왔지만, 그동안 사람들은 그가 전파하는 소식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그해 말쯤에, 블로러에 있는 파이오니아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하여, 아레티 피나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그가 책임 있는 형제를 만나 보고 싶어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형제가 도착하자, 아레티는 형제와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전부 방에서 내보냈습니다.

아레티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요.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건데, 형제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내가 세세한 내용까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알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계시록의 내용이 성취되었나요?”

형제는 “네, 대부분 성취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아직 성취되어야 될 몇 가지 점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레티는 주의 깊이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레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군요. 때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고 싶었어요.”

여러 해 동안, 아레티는 산악 지역에서 혼자 있을 때에나 병상에 있을 때에나 열정적으로 전파하였습니다. 그 대화를 나누고 얼마 되지 않아, 아레티는 충실한 가운데 지상 행로를 마쳤습니다.

끝까지 강한 믿음을 유지하다

어느덧 80대의 나이가 된 나쇼 도리는 노환으로 기력이 쇠하여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격려를 필요로 하는 일단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징집 대상이 된 젊은 형제들이었습니다. 베라트의 정교회 사제는 여호와의 증인이 급속하게 성장하는 것을 시기하여 이 청년들을 기소하도록 당국에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베라트에서 군 복무를 거부한 6명의 젊은 형제들은 몇 달간 투옥될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나쇼는 그들에게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그들에게 할 말을 비디오로 촬영하였습니다.

나쇼가 젊은 형제들에게 한 말은 이러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도 다 겪어 봤던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투옥된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국에는 여호와의 이름에 영예가 돌아갈 것입니다.”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자 나쇼는 형제들을 자신의 병실로 오게 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어찌나 통증이 심하던지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호와여, 당신은 생명의 수여자이시며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은 생명을 위한 것인데, 제가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요청을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바니아의 전도인 수가 942명으로 늘어난 것을 알게 되자, 나쇼는 “알바니아에 드디어 큰 무리가 생겼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그는 사망하여 지상 행로를 마쳤습니다.

트라지라—무정부 시기

1997년 무렵에는 사기와 뇌물 수수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습니다. 많은 알바니아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피라미드 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하였습니다. 하지만 투자한 것들이 물거품이 되자, 화가 난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바로 그때, 특별 대회일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고위 관리 밑에서 일하던 한 자매가 형제들에게 총리가 곧 사임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자매가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전례 없는 폭력 사태가 발생할 것이었습니다. 특별 대회일 프로그램은 단축되었으며, 그로 인해 형제들은 집으로 신속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회 프로그램을 마친 지 두 시간 뒤,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며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소문만 무성할 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외세의 간섭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까? 아니면 국내 정치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까? 피라미드 사업이 망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자한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블로러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국가 무기고를 부수고 들어가 무기와 탄약을 모두 탈취하였습니다. 뉴스 방송을 통해, 벌어지고 있는 일이 보도되면서 여러 도시에서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나라는 소요 사태에 휩싸였으며, 경찰은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무장 폭동이 일어난 알바니아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습니다.

알바니아에 있던 125명의 외국인 전 시간 봉사자들 대부분은 티라나로 피신하였습니다. 많은 알바니아 사람들은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이 외국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국인 파이오니아들을 출국시키는 것이 현명하였습니다. 공항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온 일부 파이오니아들을 두러스에 있는 항구로 데려갔습니다. 당시 그곳은 무장한 지방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긴장 속에서 12시간을 기다린 끝에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전국 위원회는 전국 각지의 형제들과 날마다 전화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른 아침에는 거리가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지만,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무기를 쏘아 대기 시작하였는데, 밤새 새벽까지 그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공포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내전은 혼란이라는 뜻을 가진 트라지라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영예가 돌아갈 것입니다”

중립 문제로 투옥되었던 베라트의 여섯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인 아르벤 메르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있던 감방의 벽에는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옆 감방에서 어떤 사람이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몇 주 동안 아르벤은 그에게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르벤이 석방되고 나서, 한 청년이 아르벤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익숙한 목소리였습니다. 바로 옆 감방에 수감되었던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르벤에게 앰프를 건네면서 “이걸 돌려드리려고 왔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트라지라 때 당신네 왕국회관에서 이 앰프를 훔쳤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해 준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깨끗한 양심을 갖길 원하기 때문에 물건을 다시 돌려드리려고 온 겁니다.”

아르벤은 나쇼 도리가 충절을 고수하려는 젊은 형제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이러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결국에는 여호와의 이름에 영예가 돌아갈 것입니다.”

여호와의 양들을 돌봄

외국인 장로들이 알바니아를 떠나면서, 19세 내지 20세 나이의 봉사의 종들이 대부분의 회중과 큰 집단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러한 젊은 형제 세 명이 큰 위험을 무릅쓰고 블로러에서 티라나로 왔습니다. 식량 부족이 염려되었던 전국 위원회는 형제들에게 특별히 가져가야 할 물품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야외 봉사 보고 용지가 다 떨어졌습니다”라고 젊은 형제들은 대답했습니다. 과거 연로한 충실한 형제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물질적 필요보다 영적인 필요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젊은 형제들은 두렵고 불확실하기만 한 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소식에 호응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념식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우리는 쿠커스에 있는 자매들입니다. 파이오니아들이 떠난 이후로, 우리끼리 집회를 보고 있습니다”라고 한 자매가 말하였습니다.

소요 사태로 인해, 티라나의 형제들은 쿠커스의 전도인들과 연락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 받지 않은 전도인 일곱 명이 두 곳에서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념식을 올바로 거행하지 못했을까 봐 염려하면서도, 두 장소에서 19명이 참석했다는 것을 보고하게 되어 기뻐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야간 통행금지령과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1997년에 알바니아 전역에서 3154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무정부 상태에서도 전도인들이 조심스럽게 계속 전파하면서 사람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전국 위원회는 기로카스터르의 형제들에게 식품과 출판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트럭 한 대분의 공급품을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 안전할지에 대해 토의했습니다. 한참 토의가 진행되던 중에 한 자매가 오더니 뉴스 진행자 한 사람이 형제들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면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위원회가 무엇을 토의하고 있었는지 알 리가 없는 뉴스 진행자는 이렇게 조언하였습니다. “뭘 하시든 간에, 내일 남쪽으로는 내려가지 마십시오. 테펠레너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질 계획이라는 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기로카스터르로 가기 위해서는 트럭이 테펠레너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형제들은 공급품을 수송하기로 한 계획을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이튿날 11시가 조금 지났을 때에, 테펠레너에서 피비린내 나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며 도시 내의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뉴스 속보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그날 그곳에 가지 않도록 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여러 주 동안 베델 가족은 밤새 총소리를 들었으며, 때로는 기관총과 폭탄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아침 숭배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하늘에 대고 총을 난사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유탄에 맞을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베델 가족은 안전상 건물 안에 머물러 있었으며, 번역자들은 창문에서 멀리 떨어져 바닥에 앉아 계속 작업을 했습니다.

1997년 4월에 알바니아의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국제 연합에서 파병한 7000명의 군인들이 도착하였습니다. 8월에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형제들은 지역 대회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도인들은 여러 달 동안 소규모로 모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역 대회를 열게 되어 기뻐하였습니다.

대회장으로 가기 위해 형제들이 빌린 전세 버스 몇 대를 무장 강도들이 멈춰 세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버스에 탄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달라요! 여러분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알바니아의 전파 활동은 트라지라로 인해 어떠한 영향을 받았습니까? 성장에 방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위험과 염려 때문에 영적인 필요를 더더욱 의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15개월 만에 500명의 새로운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를 시작하여 총 전도인 수가 1500명을 넘게 되었습니다.

코소보에 관심이 집중되다

트라지라가 끝나자, 총성은 자취를 감춘 것 같았으며 회중은 계속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인근의 코소보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난민들이 물밀듯이 국경을 넘어오면서 알바니아에서는 코소보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충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알바니아 전도인들은 지체하지 않고 난민들에게 희망의 소식과 위로가 되는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22명의 집단을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8월에 전쟁이 끝나자, 코소보의 형제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코소보 형제들을 따라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필요한 영적인 도움을 베풀기를 원하는 1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를 비롯한 알바니아 형제들과 이탈리아 형제들이었습니다. 1999 봉사 연도 말에 알바니아에는 1805명의 전도인이 있었으며, 코소보에는 40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한층 안정되다

나쇼 도리는 사망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출판물이 번역되고 있어 기쁘긴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의 토대로 삼을 만큼 잘 번역한 성서인 「신세계역」입니다!” 나쇼가 사망한 지 불과 3년 후인 1999년에 통치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을 알바니아어로 번역하도록 승인하였습니다.

2000년 대회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좋은 소식이 알바니아 청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알바니아어로 발표된 것이었습니다! 성서 번역 팀은 온 마음과 영혼을 쏟아 열심히 일하여 1년도 안 되어 번역을 마쳤습니다. 이전에 공산주의자이자 의회 의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 한 정규 파이오니아 자매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 번역판을 연구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성서가 산문과 시와 물 흐르듯이 이어진 기록이 들어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기적을 행하셨고 어떤 비난과 조롱을 받으셨는지를 읽고, 나는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감동적인 상황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알바니아에는 2200명의 전도인들이 있었으며, 베델 가족은 4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동안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였지만, 더 많은 방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통치체는 티라나 외곽에 위치한 머제즈에 있는 3헥타르의 부지를 매입하도록 승인하였습니다. 계속 성장하는 알바니아와 코소보의 밭을 감독하는 일을 돕기 위해, 전국 위원회는 2000년부터 지부 위원회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을 건축하기 시작한 2003년 9월에 알바니아에서는 3122명의 전도인을 보고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어 성경을 알바니아어로 번역하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전파 활동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도인들은 훌륭한 영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2004년 8월에 알바니아에서 열린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학급에 속한 20명의 젊은 형제들 중 다수는 몇 년 전 트라지라 시기에 십 대의 나이로 회중을 돌보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가적인 신권 훈련을 받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화가 난 마귀’

2005년 2월에 “자살을 부르는 여호와의 교리!”라는 머리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인 한 십 대 소녀가 자살을 했다는 거짓 소문이 텔레비전과 신문의 뉴스 보도를 통해 유포되었습니다. 사실, 그 소녀는 연구를 한 적도 집회에 참석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은 그 사건을 이용하여 전면 공격을 가했습니다.

교사들은 증인 자녀들을 조롱하였으며, 형제들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활동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형제들은 언론 매체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뉴스 보도는 더욱 나빠질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종들에게 분명히 인도와 지원이 필요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부에서는 악의적인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해, 진리를 계속 전파하는 것의 가치를 알리는 특별 강연을 마련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과 추리하라는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지난 몇 년간 여호와의 증인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었는데, 증인들이 자살을 부추긴다면 그럴 리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공격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은 1960년대에 있었던 스피로 브루호의 허위 자살 보도를 상기하도록 교훈받았습니다. 새로운 거짓 보도는 참담하게 실패할 것이었으며, 실제로 실패했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8월에 통치체 성원인 데이비드 스플레인이 알바니아와 코소보에서 온 대표자 4675명과 함께 지역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청중들은 스플레인 형제가 알바니아어 완역 「신세계역 성경」을 발표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한 증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래서 사탄이 기를 쓰고 우리를 막으려 했던 거군요! 여호와의 백성에게 좋은 일들이 이렇게 많이 일어나니 사탄이 화가 났던 겁니다.”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의 하느님의 백성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믿지 않는 많은 남편들과 친족들이 뉴스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여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극악한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베델 가족은 새로운 지부로 이사하였으며, 봉사 훈련 학교 제2기 학급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부 봉헌식

2006년 6월에, 통치체 성원들인 시어도어 재라스와 게리트 뢰시를 비롯하여 32개국에서 온 350명의 대표자가 새로운 지부 시설의 봉헌식에 참석했습니다. 1940년대에 전기 고문을 받은 소티르 체치도 봉헌식에 참석하였습니다. 현재 70대 후반인 그는 계속 즐겁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심한 고난을 겪고도 여전히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는 프로시나 제카는 “정말 꿈만 같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남편인 야니와 사별한 폴릭체니 코미노도 참석하여, 정규 파이오니아로 섬기는 딸들과 손녀딸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랜 고난의 세월을 보낸 뒤 이젠 허리가 굽은 바실 조카도 봉헌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레오니다 포프를 방문하고 1960년에 비밀리에 침례 받은 것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티라나에 있는 이전 지부는 복합 왕국회관 건물과 14명의 선교인이 거주하는 선교인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봉사 훈련 학교의 여섯 개 학급에서 충실하며 자기희생적인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알바니아 밭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950명이 넘는 정규 및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그와 동일한 열정적인 복음 전파의 영을 나타냅니다.

알바니아 증인들의 미래

알바니아의 우리 형제 자매들은 모국어로 번역된 성서와 출판물들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알바니아의 밭에서 여호와의 사업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신권적 책임을 돌보도록 훈련받고 있는 열심 있고 유능한 남자들에 더해, “좋은 소식을 알리는 여자들은 큰 군대”를 이루고 있습니다.—시 68:11.

알바니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음과 같은 영감 받은 말씀이 참됨을 증언할 수 있는 산증인입니다. “너를 치려고 만들어지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재판에서 너를 거슬러 일어나는 혀는 모두 네가 정죄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유산이다.” (이사야 54:17) 그들은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과 힘으로 말미암아 전체주의 통치, 고문, 격리, 악의적인 보도, 개인적인 문제와 같은 시련하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알바니아의 여호와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충성스러운 사랑과 축복을 확신하는 가운데 앞날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하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영예와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희망에 대해 기뻐합니다. (잠언 27:11; 히브리 12:1, 2) 알바니아의 신권 역사 전체에 걸쳐 변하지 않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여호와께서는 노소를 막론하고 자신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바친 크고 작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히브리 6:10; 13:16.

[130면 삽입]

처음에 번역된 제목은 「하나님의 기타」였다

[140면 삽입]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제들처럼 나가서 싸웠을 거야!”

[189면 삽입]

“야외 봉사 보고 용지가 다 떨어졌습니다”

[132면 네모와 삽화]

알바니아 개요

국토

알바니아는 유럽 남동부, 다시 말해 이탈리아 동쪽 최남단 건너편과 그리스 북쪽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2만 875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며 362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안선이 아드리아 해와 이오니아 해를 따라 나 있다. 블로러에서 사란더까지 뻗어 있는 알바니아의 해안 지대를 따라 큰 산들을 배경으로 백사장과 청록색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북부 지방과 내륙 지방은 주로 험준한 산악 지대인 반면에 남서부 지방은 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저지대가 많다.

주민

인구는 360만 명으로 추산되며, 소수의 집시, 그리스인, 세르비아인을 제외하고는 대개 알바니아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

남부 해안가에 있는 여러 평원 지대의 여름 평균 기온은 섭씨 26도이다. 하지만 디베르 북부의 산지는 겨울에 영하 25도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식품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에는 시금치, 치즈, 토마토, 양파 등 다양한 야채나 고기를 넣은 파이를 뷔렉이라고 한다. 타바에코시트는 닭고기나 양고기를 요구르트와 딜을 섞은 향긋한 소스와 함께 구워 낸 요리이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스프와 스튜를 많이 먹기 때문에, 식사할 때 숟가락을 즐겨 사용한다. 종종, 특별한 행사 때 양고기가 나오면 귀한 손님에게는 양 머리를 대접한다. 알바니아의 대표적인 디저트 가운데는 페이스트리 빵에 시럽이나 꿀과 함께 견과류를 얹은, 바클라바(오른쪽 사진)와 카다이프가 있다. 알바니아 사람들의 주식은 빵이다. 식사했다는 말을 하려면, “헝라 부크”라고 하면 되는데, 이 말은 “빵을 먹었습니다”라는 뜻이다.

[134면 네모와 삽화]

초창기 대회

미국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알바니아 사람들은 일요일에 열리는 알바니아어 공개 집회를 제외하고는 대개 영어 회중이나 그리스어 회중과 연합하여 집회를 보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그리스어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가슴표만큼은 모국어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알바니아 성경 연구생의 3일간의 대회”라고 적힌 가슴표를 달게 되어 기뻐하였다.

[삽화]

1920년대 후반에 보스턴 대회에서 알바니아 형제들(아래)이 착용한 가슴표(오른쪽)

[151, 152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프로시나 제카

출생 1926년

침례 1946년

소개 십 대 시절에 진리를 배웠다. 부모로부터 반대를 받고 당국에 의해 격리되기도 했지만, 항상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시며 그분의 조직이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2007년에 충실한 가운데 사망하였다.

▪ 프로시나는 1940년대에 오빠들에게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증인이 아니었던 프로시나의 부모는 자신들이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프로시나를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골레 프요코라는 형제는 프로시나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딸처럼 보살펴 주었습니다.

프로시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은 투표를 거부해서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방 안에는 나를 제외하고 약 30명의 경찰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이렇게 소리치더군요. ‘우리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아?’ 나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주권자인 주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그냥 내보내!’ 하고 말하더군요. 내 생각이 맞았던 셈입니다. 여호와께서 정말 함께하셨던 거지요!”

1957년에 프로시나는 루치 제카와 결혼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세 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 루치는 알바니아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새로 구성된 전국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5년의 인테르님(감금형)을 선고받아 그람슈로 유배되어 프로시나와 자녀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루치는 그곳에서도 계속 전파하고 여호와의 조직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람슈 주민들이 현재까지도 그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남편이 인테르님 형에 처해 있는 동안, 공산당은 프로시나를 감시 대상 명단에 올려 공식적으로 식품을 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프로시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몇몇 형제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눠 주었기 때문이지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 덕분에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사망한 이후로 형제들을 접할 기회가 더더욱 드물어졌습니다. 하지만 프로시나는 꾸준히 전파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60년대에 존 마크스가 우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1986년에야 마침내 그의 아내인 헬렌을 만났는데, 마치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것 같았어요! 남편과 내가 마크스 부부에게 비밀리에 소식을 보내면, 마크스 부부가 그 소식을 브루클린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죠.”

1992년에 금지령이 해제되었을 때, 프로시나는 알바니아에 남아 있던 침례 받은 증인 9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프로시나는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2007년에 사망한 당일에도 봉사에 나갔습니다. 프로시나는 사망하기 얼마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타협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나에게 세계적인 대가족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알바니아에서 이렇게 많은 우리의 신권 가족을 보게 되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셨으며, 사랑에 찬 손길로 여전히 우리를 붙들어 주고 계십니다!”

[삽화]

프로시나 제카, 2007년

[159, 160면 네모와 삽화]

출판물이 거의 없던 시기에서 풍족한 시기로

바실 조카

출생 1930년

침례 1960년

소개 전체주의 통치 아래서도 진리를 위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다. 현재 티라나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다.

▪ 1930년대에 내가 살던 바르마슈 마을에서 그리스어 「파수대」를 본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는 잡지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 말이 맞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성서를 가지고 있으면 위험한 상황이 되었지만, 나는 성서를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티라나에서 온 형제를 한 인척의 장례식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그에게 마태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날”의 표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형제로부터 설명을 들은 나는 즉시 내가 알게 된 내용을 가능한 대로 모든 사람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1959년에 나는 레오니다 포프의 집에서 비밀리에 열리는 집회에 형제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당시에 나는 계시록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야수와 큰 바빌론의 정체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형제들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 나는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 년 뒤에 나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열심히 전파하였는데, 그로 인해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삐걱거리는 목재 수레를 구해 티라나에서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형제들과 자주 접촉할 수 없었고 출판물도 없었지만, 나는 꾸준히 전파하였습니다.

인테르님 형을 받아 유배되기 전인 1960년대 초에 레오니다 포프는 알바니아로 밀반입된 그리스어 출판물 몇 권을 간신히 손에 넣었습니다. 레오니다가 구두로 번역하면, 나는 그가 한 말을 노트에 받아 적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시킨 대로 복사본을 만들어 베라트와 피에르와 블로러에 있는 몇몇 형제들에게 보냈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 참으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수많은 출판물을 보면 가슴이 벅찹니다. 1992년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전한 알바니아어 잡지는 1700만 부가 넘습니다! 새로운 출판물들이 알바니아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모국어로 된 「신세계역」 전서를 갖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출판물이 없었던 시기를 돌이켜 보면 절로 감격의 눈물이 나옵니다. 아주 오랫동안 출판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고마운 것입니다!

[163, 164면 네모와 삽화]

고국에서 진정한 천직을 발견하다

아르디안 투트라

출생 1969년

침례 1992년

소개 이탈리아에서 진리를 배우고 알바니아로 돌아왔다. 알바니아 지부 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 나는 21살 때인 1991년에 많은 난민들과 함께 알바니아를 빠져 나왔습니다.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강탈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가난에 허덕이는 알바니아를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벅찼습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이탈리아 브린디시에서 이틀을 보낸 후에 난민 수용소를 몰래 빠져나와 일자리를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작은 전단을 주면서, 그날 오후에 열리는 집회에 초대하였습니다. 전단에는 알바니아어로 성서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이 복사되어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쎄,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 누군가 직업을 알선해 줄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따뜻한 환대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왕국회관에서 집회가 끝난 후에, 모든 사람이 다가와서 친절하고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습니다. 한 가족은 나를 식사에 초대해 주었습니다. 불법 체류자이자 초라한 알바니아 난민인 나를 참으로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 준 것이었습니다!

다음 집회에서 비토 마스트로로사는 나에게 성서 연구를 제의하였습니다. 나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고, 얼마 되지 않아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92년 8월에 나는 이탈리아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체류 허가를 위한 서류가 마침내 정리되었습니다. 나는 안정된 좋은 직업을 갖게 되어, 알바니아에 사는 가족들에게 계속 돈을 부쳐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알바니아에서도 밭이 열렸으니까, 그곳에서도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야. 알바니아로 돌아가서 봉사해야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보내 주는 돈이 필요할 텐데.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그러던 중에 티라나의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알바니아로 돌아와, 11월에 그곳으로 이주하게 되어 있는 일단의 이탈리아 특별 파이오니아들에게 알바니아어를 가르칠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본에 관해 듣고는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떠나온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인데 기쁘게 자원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알바니아어도 할 줄 알고 알바니아 문화권에서 자란 나는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결단을 내리고 그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곧바로 나는 작은 규모의 베델에서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에는 알바니아어를 가르쳤으며 오후에는 번역을 도왔습니다. 처음에 내 가족들은 못마땅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내가 알바니아로 돌아온 이유를 이해하게 되자, 좋은 소식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부모님과 누나 두 명 그리고 형 한 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직업과 돈을 포기하고 돌아온 것에 대해 후회할 것 같습니까?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알바니아에서 진정한 천직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정말 중요하고 지속적인 기쁨을 주는 일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해 여호와를 섬기는 일입니다!

[삽화]

아르디안과 그의 아내인 노아디아

[173, 174면 네모와 삽화]

비밀 집회가 끝나다

아드리아나 마무타이

출생 1971년

침례 1993년

소개 비밀 집회에 초대받은 이래로 여러 가지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현재 특별 파이오니아로 활동하고 있다.

▪ 1991년에 사촌이 사망하였을 때, 우연히 나는 바리어라는 여자가 성서를 근거로 고모를 위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즉시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더니, 자신의 친구인 라몬다를 만나 보라고 하면서 그가 일하는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라몬다의 가족은 성경 “연구반”의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라몬다는 새로운 사람은 연구반의 모임에 곧바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한동안 성서 토의를 해야 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배우는 내용이 무척 마음에 들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집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구반은 침례 받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원래 소티르 파파 그리고 술로 하사니와 함께 집회를 보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시구리미가 연구반에 침투하여 형제들을 경찰에게 넘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구반 성원들은 모두 조심스러웠고, 집회에 초대할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했습니다!

처음 참석한 집회에서, 나는 친한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해서 우리가 배우는 내용을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나는 배운 내용을 일마 타니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일마도 연구반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명으로 이루어졌던 작은 규모의 우리 연구반은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1992년 4월에 마이클 디그레고리오와 린다 디그레고리오가 베라트를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이클의 강연에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초대하도록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54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침례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 우리는 여러 시간에 걸쳐 디그레고리오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어떻게 전파하고 집회를 진행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호와의 증인은 법적 인가를 받았습니다. 두 형제와 함께 일마와 나는 티라나로 가서 호별 봉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배운 것을 베라트에 있는 다른 성원들에게 알려 주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렇게 하였습니다. 1993년 3월에 이탈리아 출신의 특별 파이오니아 4명이 베라트에 배정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회중은 크게 발전하였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공개적으로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해 3월에 일마와 나는 티라나에서 열린 최초의 특별 대회일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대회에는 585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우리는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얼마 안 있어 현지인으로서는 최초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비밀리에 활동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코르처에서 봉사하도록 배정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일마는 아르벤 루본여와 결혼했습니다. 아르벤은 몇 달 앞서 코르처에서 혼자 전파하던 형제였습니다. 나중에 일마와 남편은 순회 활동을 하게 되었고, 현재는 베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일마를 연구반에 초대하기를 참 잘했습니다!

최근에 5500여 명이 참석한 지역 대회에서 앉아 있다가, 비밀 연구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큰 변화를 가져 오셨습니다! 이제는 집회와 대회를 공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많은 형제들이 베라트를 떠나기는 했지만, 소규모였던 연구반이 현재는 번창하는 5개의 회중이 되었습니다!

[삽화]

일마(타니) 루본여와 아르벤 루본여

[183면 네모와 삽화]

“좋아, 그렇게 하자!”

알틴 호자와 아드리안 슈컴비

출생 1973년 (둘이 동일)

침례 1993년 (둘이 동일)

소개 두 사람은 파이오니아를 하기 위해 대학교를 중퇴하였다. 현재 회중의 장로들로 섬기고 있다.

▪ 1993년 초에, 이 두 사람은 티라나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배운 내용을 장시간에 걸쳐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의 말은 모두 성서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나중에 더 많이 배워 알게 되었고, 배운 것을 적용하였으며, 같은 해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해 여름에 그들은 전도인이 없는 쿠초브로 전파하러 갔습니다.

티라나로 돌아온 후에, 아드리안은 알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쿠초브로 가서 본격적으로 전파 활동을 하는 건 어때?”

알틴은 “좋아, 그렇게 하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침례 받은 지 7개월 후에 쿠초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풍성히 축복하셨습니다. 현재 쿠초브에는 90여 명의 전도인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약 25명의 증인들이 그곳을 떠나 파이오니아로 혹은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아드리안과 알틴과 함께 성서 연구를 한 사람들입니다.

알틴은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출세의 길을 추구하지 않기로 결심했죠. 1993년에 나도 그와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뿐입니다. 나는 ‘좋아, 그렇게 하자!’라고 말한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191, 192면 네모와 삽화]

무신론을 가르치던 교사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아나스타스 루비나

출생 1942년

침례 1997년

소개 자녀들을 통해 진리를 배우기 전까지, 군대에서 부하들에게 무신론을 가르쳤다. 현재는 장로이자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 1971년에, 나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 군부대의 정치 위원이 되었습니다. 1966년에 정부가 군대 계급을 폐지했기 때문에 그러한 호칭이 사용되었습니다. 내가 맡은 책임들 가운데 하나는 부하들에게 무신론적 이념을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사상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에게는 아내와 세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1992년에 아들인 아르탄이 티라나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엔 여동생인 아닐라도 집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시간을 낭비하고 매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인해 집에서 말다툼이 벌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호기심에 「파수대」를 한 부 집어 들었습니다. 의외로 잡지의 내용이 합리적으로 보였습니다. 아르탄과 아닐라가 내게 성서 연구를 하도록 꾸준히 권하였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성서를 연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1995년에 「생명—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 책이 알바니아어로 발행되었습니다. 아르탄과 아닐라가 나에게 그 책을 주었습니다. 확신이 서는 데 그 책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점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이제는 핑곗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연구를 해야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인 리리에도 연구에 동참하였으며, 우리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발전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당시 53세였습니다. 정치적·군사적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발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내게서 무신론을 배웠던 사람들에게 전도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 전도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연구를 하던 어느 날, 비토 마스트로로사가 나에게 타르수스의 사울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순간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지만, 진리를 배우고 나자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도와주신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덜 엄하고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고, 군대 지휘관 티를 벗어 버리도록 여호와께서 계속 나를 돕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가끔 내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점차 발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진리 때문에 자녀들과 말다툼을 벌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자녀들이 대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르탄은 특별 파이오니아이자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딸들인 아닐라와 엘리오나는 둘 다 티라나에 있는 베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창조주에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살아 계신 유일한 참하느님이신 여호와의 약속에 근거한 진정한 희망을 전하는 일은 참으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 아르탄, 아닐라, 리리에, 아나스타스, 엘리오나와 그의 남편인 리날도 갈리

[176, 177면 도표와 그래프]

연대표—알바니아

1920-1922년 미국에서 알바니아 사람들이 진리를 접하다

1922년 타나스 이드리지가 진리를 가지고 기로카스터르로 돌아오다

1925년 알바니아에서 3개의 소규모 성경 연구반이 활동하다

1928년 여러 도시에서 “창조 사진극”을 상영하다

1930

1935-1936년 광범위한 전파 활동을 수행하다

1939년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되다

1940

1940년 중립 때문에 아홉 명의 형제들이 투옥되다

1946년 공산 정부가 통치를 시작하다

1950

1960

1960년 전국 위원회가 알바니아의 활동을 감독하기 시작하다

1962년 전국 위원들이 노동 수용소로 유배되다

1967년 알바니아가 공식적인 무신론 국가가 되다

1980

1990

1992년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 인가를 받다

1996년 밀턴 헨첼이 첫 베델 봉헌식에 참석하다

1997년 트라지라가 시작되다

2000

2005년 알바니아어 「신세계역」 완역을 발표하다

2006년 티라나의 머제즈에서 지부 사무실을 봉헌하

2010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4,000

3,000

2,000

1,000

1930 1940 1950 1960 1980 1990 2000 2010

[13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몬테네그로

코소보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오안니나

스쿠타리 호

오흐리드 호

프레스파 호

아드리아 해

알바니아

티라나

슈코더르

쿠커스

부렐

머제즈

두러스

카바여

그람슈

쿠초브

피에르

베라트

코르처

블로러

테펠레너

컬키레

바르마슈

퍼르메트

기로카스터르

사란더

[126면 전면 삽화]

[128면 삽화]

타나스 이드리지는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진리를 배우고 나서, 알바니아 기로카스터르로 가서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129면 삽화]

남동생에게 진리를 전한 소크랏 둘리

[137면 삽화]

알바니아 고관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 니콜라스 크리스토

[142면 삽화]

보스턴의 알바니아 형제들이 엔베르 호자에게 보낸 두 페이지에 걸친 편지

[145면 삽화]

레오니다 포프

147면 삽화]

“내가 하지 않은 말에는 서명하지 말라고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소티르 체치

[149면 삽화]

존 마크스가 알바니아로 가기 전에 아내 헬렌 마크스와 함께

[154면 삽화]

여행하는 감독자로 활동한 스피로 브루호

[157면 삽화]

로피 블라니

[158면 삽화]

혼자서도 꾸준히 기념식을 지킨 쿨라 지다리

[167면 삽화]

아르디안과 그의 아내인 노아디아

[172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을 법적으로 인가한 법인 설립 허가서 제100호

[175면 삽화]

최초의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회중 집회, 1992년 티라나에서

[178면 삽화]

혼자서 충실하게 전파한 아레티 피나

[184면 삽화]

오래된 건물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사무실

[186면 삽화]

“투옥된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나쇼 도리

[194면 삽화]

데이비드 스플레인이 알바니아어 완역 「신세계역」을 발표하는 모습

[197면 삽화]

현재 알바니아에서 섬기고 있는 선교인들

[199면 삽화]

알바니아 지부

지부 위원회: 아르탄 두카, 아르디안 투트라, 마이클 디그레고리오, 다비데 아피냐네지, 스테파노 아나트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