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기
여호와를 섬기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캐나다 베델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인쇄 작업을 하는 건물 바닥을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열여덟 살이던 1958년이었죠. 매일매일이 즐거웠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잡지가 인쇄되어 나오면 가장자리를 절단하는 기계를 다루는 일을 했죠. 베델에서 일하는 게 정말 행복했습니다!
이듬해에 베델 가족에게 한 가지 광고가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 새로운 윤전 인쇄기가 들어오기 때문에 거기서 일할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나도 신청했는데, 기쁘게도 그 신청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른 3명의 캐나다 베델 성원인 데니스 리치, 빌 매클렐런, 켄 노르딘과 함께 가게 되었죠.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오랫동안 일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전해 드릴 소식이 있어요. 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요!” 믿음과 영성이 강한 어머니는 말수가 적은 편이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많은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내 결정을 지지해 주시는 것을 느꼈죠.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먼 곳으로 떠나게 되어 슬퍼하시면서도 그 결정을 결코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나다!
우리 4명은 브루클린 베델에서 납 활자를 이용한 인쇄 기술에 대해 3개월간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 화물선을 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그때 막 20살이 되었죠.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우리는 밤 기차를 타고 요하네스버그까지 긴 여행을 했습니다. 새벽에 기차가 처음으로 멈춘 곳은 반사막 지역인 카루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덥고 먼지와 연기가 자욱한 곳이었죠. 우리 네 사람은 창밖을 바라보며 여기가 대체 어떤 곳일까 하고 궁금해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죠. 하지만 여러 해 후에 그 지역을 다시 방문했을 때, 우리는 그곳의 작은 마을들이 매력적이고 평화로운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년 동안 놀랍고 정교한 라이노타이프를 사용해서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 인쇄를 위한 활자를 배열하는 일을 했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뿐 아니라 북쪽에 있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사용하는 여러 아프리카 언어로 잡지를 인쇄했습니다. 우리를 지구 반대편까지 오게 만든 새로운 윤전 인쇄기가 정말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후에 나는 인쇄, 발송, 번역과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는 공장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바빴지만 만족스럽고 보람 있는 삶이었죠.
결혼해서 새로운 임명을 받다
1968년에 나는 베델 인근에 사는 파이오니아 자매인 로라 보엔과 결혼했습니다. 로라는 번역부에서 타이핑 작업도 했죠. 당시에는 새로 결혼한 부부가 베델에서 계속 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나는 좀 걱정이 되었죠. 10년 동안 베델에서 음식과 숙소를 제공받았는데 우리가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받는 실비로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매달 요구되는 봉사 시간, 재방문 수, 출판물 배부 수를 충족시키면 각자 25랜드(당시 미화로 35달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임대료, 식비, 교통비, 의료비 등을 모두 내야 했죠.
우리는 인도양 해안에 있는 더반시 근처의 작은 집단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인도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1800년대 후반에 설탕 산업에 종사하던 계약 노동자들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달라졌지만 맛있는 카레와 같은 고유의 음식과 문화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은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봉사하기가 수월했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매달 150시간을 봉사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나는 처음으로 봉사하는 날 6시간을 봉사하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날은 덥고 습했죠. 재방문이나 성서 연구가 하나도 없어서 6시간 동안 호별 봉사만 해야 했습니다. 한참 봉사를 하고 시계를 봤는데 겨우 40분밖에 지나지 않았죠! 우리가 앞으로 계속 잘 봉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우리는 계획적으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보온병에 수프나 커피를 챙겼습니다. 휴식이 필요하면 근처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워 놓고 쉬었죠. 때로는 작고 귀여운 인도 아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며칠 후부터는 봉사하고 처음 두세 시간이 지나면 남은 하루가 정말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후대를 잘하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성경 진리를 전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종교심이 깊었죠. 많은 힌두교인들이 우리가 전하는 소식에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예수, 성경, 미래의 평화로운 신세계, 부활 희망에 대해 기꺼이 배우려 했습니다. 1년 후에 우리는 성서 연구가 20건이나 되었습니다. 매일 우리는 우리와 성서 연구를 하는 가족들 중 한 가족과 맛있는 식사를 함께했죠.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게 우리는 아름다운 인도양의 연안에서 순회 활동을 하라는 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도인들을 격려하고 그들과 봉사하기 위해 회중을 방문하는 동안 매주 한 가족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의 자녀와 애완동물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가족처럼 지냈죠. 그렇게 2년을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지부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시 베델에서 일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죠.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말 즐겁게 봉사하고 있는데요.” 물론 우리는 어디로 임명되든 기꺼이 섬기려고 했습니다.
다시 베델에서 일하다
나는 봉사부로 임명되어 장성하고 경험 많은 여러 형제들과 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순회 감독자가 회중을 방문한 후에 보고서를 제출하면 봉사부는 그 보고서에 근거해서 회중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회중을 격려하고 필요한 지침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죠. 서기 형제들이 코사어, 줄루어, 그 밖의 언어로 된 순회 감독자들의 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영어로 작성한 지부 편지들을 그 아프리카 언어들로 번역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또한 그처럼 열심히 번역 작업을 지원해 준 형제들 덕분에 아프리카의 흑인 형제 자매들이 겪는 어려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당시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인종 격리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인종에 따라 거주 지역이 정해져 있어서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기가 어려웠죠. 흑인 형제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언어로 봉사하고, 그 언어로 진행되는 회중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회중에만 임명되었기 때문에 흑인 형제들을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형제들과 그들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 알 기회가 생긴 거죠. 그 지역의 전통과 신앙 때문에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성경적인 전통을 지키지 않았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심한 반대를 받으면서도 영매술과 관련된 관습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용기에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또한 시골 지역 사람들은 가난했습니다. 대부분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성경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죠.
나는 숭배의 자유와 중립 입장과 관련된 몇몇 소송에서 형제들을 지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린 증인 자녀들이 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일에 참여하지 않아서 퇴학을 당했죠. 그처럼 충성스럽고 용기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믿음이 크게 강해졌습니다.
당시 스와질란드로 알려진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형제들은 또 다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국왕인 소부자 2세가 죽자 모든 국민이 특정한 애도 의식을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남자는 머리를 밀고 여자는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죠. 많은 형제 자매들이 조상 숭배와 관련된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형제들의 충실함과 충성과 인내를 보고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 덕분에 우리의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인쇄부로 돌아오다
1981년에 나는 컴퓨터를 이용한 새로운 인쇄 업무를 지원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인쇄부로 돌아왔죠. 정말 흥미진진한 시기였습니다! 인쇄 업계가 변화를 맞고 있었습니다. 인쇄기 판매 업체의 지역 책임자가 지부에서 사진 식자기를 조건 없이 테스트하게 해 주었죠. 그래서 결국 라이노타이프 9대를 처분하고 사진 식자기 5대를 새로 들였습니다. 또 새로운 오프셋 윤전 인쇄기도 설치했죠. 그 덕분에 인쇄 속도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 방식이 사용되면서 멥스(MEPS) 즉 다종 언어 전산 출판 시스템을 이용한 새로운 조판 방식이 개발되었습니다. 처음에 우리 4명의 캐나다 베델 형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와서 사용했던 다루기 힘들고 느린 라이노타이프나 납 활자 인쇄기와 비교하면 정말 기술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이사야 60:17) 그때 우리 네 사람은 모두 훌륭하고 영적인 파이오니아 자매들과 결혼해 있었습니다. 빌과 나는 계속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었고, 켄과 데니스는 베델 인근에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죠.
지부가 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성경 출판물을 더 많은 언어로 번역하고 인쇄해서 다른 지부들로 발송했죠. 그러다 보니 새로운 지부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요하네스버그 서쪽의 아름다운 지역에 지부 시설을 지어 1987년에 봉헌했습니다. 그처럼 조직이 확장되는 것을 모두 지켜보고 여러 해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부 위원으로 봉사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또다시 새로운 임명을 받다!
2001년에, 새로 생긴 미국 지부 위원회에서 일하라는 임명을 받고 매우 놀랐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정든 벗들과 헤어지는 것이 슬프긴 했지만, 미국 베델 가족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기쁘기도 했죠.
하지만 연로한 장모님을 두고 떠나야 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뉴욕에 있는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죠. 하지만 3명의 처제가 장모님을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경제적으로 돌봐 드렸습니다. 처제들은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전 시간 봉사를 할 수 없지만, 언니 부부가 계속 임명을 수행할 수 있게 어머니를 보살펴 드릴 수는 있어요.” 그런 처제들이 정말 고맙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형 부부도 혼자가 되신 어머니를 보살펴 드렸습니다. 20년 넘게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죠. 우리가 뉴욕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어머니를 돌봐 준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기꺼이 생활을 조정해 가면서 때때로 매우 힘들 수 있는 책임을 맡아 주는 희생적인 가족을 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나는 몇 년간 미국 지부에서 출판물 생산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는데 지금은 그 일이 훨씬 현대화되고 간소화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구매부에서 일하고 있죠. 현재 미국 지부에는 약 5000명의 정규 베델 성원과 2000명가량의 출퇴근 봉사자가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이 큰 지부에서 일할 수 있어서 매우 즐거웠습니다!
60년 전에는 내가 이곳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을 다해 나를 지원해 주었죠. 나는 아주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다양한 임명을 수행한 것과 전 세계 여러 지부를 방문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비롯해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한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80세가 넘었고 이전에 비해 일이 줄었습니다. 젊고 유능한 여러 형제들이 많은 책임을 맡고 있죠.
시편 필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호와를 하느님으로 모시는 나라[는] 행복합니다.” (시 33:12)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행복한 여호와의 백성과 함께 기쁨을 맛보는 삶을 살게 되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